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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강민재의 유럽여행기 #18]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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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화살표가 그려진 이정표 뒤로 무지개가 걸쳐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 까미노 (Camino) 철십자가와 무지개

 

희태형과 알베르게를 나서서 어둠이 깔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영국인 작가 아저씨 한 분이 불빛이 없다며 같이 가자고 하셨다. 내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어제 내린 비로 진흙탕이 된 산을 천천히 올랐다. 여정 중에 가장 높은 산이라 했지만 생각보다 완만하여 오르기가 어렵지 않았다.

살집이 좀 있으시던 영국인 아저씨는 천천히 올라온다고 하셨고, 우리는 곧 산 위의 작은 마을, 폰세바돈(Foncebadon)에 도착하였다.


비온 뒤, 작은 마을 폰세바돈의 풍경.

폰세바돈은 어제 햄누나가 묵었던 곳으로 벽난로가 따듯한 산장같은 알베르게가 있다고 했다. 희태형과 아침을 먹을 겸 해서 그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알베르게에 들어오니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산장에서 바나나와 빵을 사고, 아침을 해결했다. 산장 안에는 프랑스인 가족들과 집시처럼 보이는 비쩍 마른 남자가 있었다. 스트라이프 긴 팔 셔츠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 그 집시는 어제 햄누나가 이상한 음침한 노래를 틀고 마리화나를 나누어 주었다고 했던 그 음악가 같았다. 심지어 불까지 피워놓고 의식까지 했다고 하는데, 무언가 가까이 가기 싫어졌다.

안개비가 내리는 밖으로 나와 폰세바돈을 나섰다. 가다보니 안개 사이로 커다란 돌무더기 위로 높은 철 십자가 하나가 보였다. 예부터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돌이나 물건을 십자가 밑에 두고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순례자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가 되어 있었다. 주변에 있던 돌 하나를 주워 올려두고, 옆에 있는 작은 교회 처마 밑에 앉아서 비를 피했다.

안개 낀 산길을 한참 걸었다. 어느새 시야가 탁 트이며 저 멀리 선명하고 거대한 무지개 하나가 산들 사이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구름 사이로 틈틈이 보이는 파란 하늘과 햇빛,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풀들과 어우러져 그림 속에 들어선 것 같았다. 우리 뒤로는 구름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방금 그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무지개.

무지개는 너무나도 선명해 빨주노초파남보 그 색을 뚜렷이 확인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정도로 밝은 무지개는 본 적이 없었다. 무지개는 우리가 산을 내려가는 순간까지 계속 우리 앞에 떠 있었다.


실제 무지개는 사진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도로 왼쪽으로 물기 가득 머금은 나무들이 이어졌는데, 구름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들이 나뭇잎 사이로도 들어와 차가운 몸을 이따금씩 따뜻하게 비췄다. 그럼에도 산을 내려가는 도중에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몸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희태형의 파란색 우의가 거의 완전히 찢어질 때쯤, 그리고 희태형의 소중한 지팡이 두 개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 우리는 저 밑으로 무지개와 함께 펼쳐진 작은 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어제 만났던 러시아 친구 다이아나(Diana)가 뒤에서 나타나 우리를 앞질러 갔다. 다음에 도착한 산 위의 작은 마을 엘 아세보 데 산 미겔(El Acebo de San Miguel)에서 점심 먹을 때 다이아나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산 아래로 보이는 풍경. 저 멀리 다이아나가 걷고 있다.

엘 아세보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바르에 들어갔는데, 많아도 너무 많아서 다시 나왔다. 왜 많은가 했는데, 아무래도 카운터의 점원 아가씨가 예쁘장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가 간 수퍼마켓에는 사람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맥주 한 캔과 또르띠야를 먹고 쉬고 있는데, 관광버스 한 대가 서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맛만 보는 식으로 까미노를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간이 정말 부족해서 이렇게라도 오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길이 지금보다 더 상업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마추픽추를 연상시켰던 엘 아세보의 집 터.

마을 몇 개를 지나고 바위 가득한 험한 계곡을 지나 강 하나가 흐르는 평화로운 마을인 몰리나세카(Molinaseca)에 도착했다. 산 하나를 넘으니 집 양식이 많이 바뀌어 있었는데, 특히 지붕의 기와가 전에는 주황빛을 띄었던 것이, 여기서부터는 검은색이었다. 마을은 성당하나가 있는 중세풍의 마을이었는데, 옛날 귀족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마을이 너무 아름다워 희태형을 먼저 보내고 이곳에서 하루를 지낼까 계속 고민했다. 마을의 거리는 중세의 거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한참을 발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음 나오는 소도시 폰페라다(Ponferrada)의 템플기사단 요새를 꼭 보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엔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가는 도중에 다이아나를 만나 함께 폰페라다까지 걸었다. 금방 도착했다.


아름다운 다리와 중세풍의 건물들이 아름다웠던 몰리나세카의 풍경.


기부제로 운영되는 알베르게에 짐을 푸니, 햄누나 희태형이 있었다. 햄누나는 얼마 전에 핸드폰을 변기에 빠뜨려서 와이파이 존에서만 노트북으로 연락이 됐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셋이 도시 이곳저곳을 돌고, 내가 보고 싶었던 기사단의 요새도 볼 수 있었다. 석양에 비치는 커다란 성채는 디즈니의 성과 비슷하기도 했다.


폰페라다의 템플 기사단 요새의 모습.

저녁은 피자집에서 먹었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햄누나가 만약 이렇게 걷고 여행하면서도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나는 뭐라도 남을 거라고, 적어도 산티아고 길이 어딘지 지도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하지만 나도 어느새 이미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폰페라다의 저녁. 광장의 야경.

폰페라다의 르네상스 시계탑 모습.

[다음 주에 계속]

[글/사진 강민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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