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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강민재의 유럽여행기 #23]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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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 까미노 (Camino) 갈리시아의 안개를 뚫고

 

20161027

밤새 살짝 내린 비 때문인지 아직 어두운 새벽 공기는 축축했다. 오늘은 짐 없이 여유롭게 기타를 치면서 걷고 싶어서 배낭을 배달로 부쳤는데 하필 오늘 날씨가 이 모양이다. 아침을 대충 때우고 어두운 길을 나서는데, 노란 머리에 키 작은 청소년 정도로 보이는 백인 친구가 같이 가자고 했다. 비 때문에 안개가 잔뜩 끼어 너무 어둡고, 마침 그 친구가 헤드랜턴이 있기도 해서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언덕 밑이 안개에 잠기어 버린 갈리시아의 아침.

처음에 십대정도로 보았던 이 친구의 이름은 루카스로 올해 만 19살이 된 대학생이었다. 집은 바르셀로나라고 했다. 안개가 잔뜩 낀 갈리시아의 목장들을 지나면서 비슷한 대학생 또래의 루카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대충 정치나 경제 같은 이야기였는데, 특히 스페인 같은 경우도 경제난이 심각하여 많은 청년들이 취업걱정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루카스 같은 경우도 현재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스페인에 일자리도 없고 공부환경도 좋지 않아서 프랑스나 미국에 유학을 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산티아고까지 100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석주. 특이하게도 100km 남았다는 석주는 이것 외에도 몇 개가 더 있는데 무엇이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작은 마을들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여 을씨년스러운 포르토마린(Portomarin)이라는 소도시에 이르렀다. 포르토 마린에는 높고 커다란 다리 하나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 밑으로는 옛날에 댐 공사 이후 수몰되었다는 옛 포르토마린의 폐허가 강둑과 물 위로 처참하게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보이는 포르토마린의 모습.

아찔한 다리를 건너 포르토마린에서 루카스와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 배낭은 곤자르(Gonzar)라는 마을에 보내놓았는데, 아마 오늘은 조금 더 갈 것 같았다. 루카스는 아직 학기 중이라 빨리 산티아고를 찍고 돌아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도중에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포르토마린의 아찔한 다리.

옛 포르토마린의 폐허. 강둑과 강 한가운데 집터들만 남아있다.

포르토마린을 나와서 걷다보니 어느새 안개와 구름이 사라지고 뜨거운 햇볕이 쏟아졌다. 어느새 몸이 지쳐가고 걸음이 느려질 때쯤, 곤자르에 도착했다. 나는 짐을 찾고 가야했기 때문에 여기서 루카스를 보냈다. 곤자르는 말과 소똥 냄새가 코를 찌르는 마을이었는데, 마을 자체가 활기가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어 잠시도 머무르기 싫은 곳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짐을 찾고 쉬지 않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해가 개인 뒤, 햇빝이 내리 쬐는 갈리시아의 풍경.

최대한 쉬지 않으려 했건만 오 오스삐딸(O Hospital)이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한 번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마을을 지나면 꽤 가파른 언덕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마을 끝에 있는 작은 알베르게 겸 바르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축 쳐진 채로 한참 쉬었다. 안그래도 강한 스페인의 햇볕이 갈리시아의 습한 공기와 만나 몸을 너무 축 쳐지고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제 산티아고까지 100km도 남지 않았다. 며칠 안 남은 상황. 조금만 더 힘을 내야 했다.

언덕을 넘어 숲길들을 헤쳤다. 걷는 도중에 구덩이에 다리가 빠져 넘어졌는데, 순간적으로 수풀에 손을 짚은 순간, 손이 놀랄만큼 따가워 재빨리 빠져나왔다. 손에 길게 자국들이 생기며 부풀어 오르는데, 순간 얼마 전에 SNS에서 본 맹독 식물이 떠올라서 두려워졌다. 가까운 바르에 가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게 갈리시아에서는 흔한 식물로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을 거라고 했다. 너무 놀라서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얼얼한 손을 문지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렉세(Airexe)라는 마을의 한 알베르게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여기가 시립 알베르게인줄 알고 체크인을 했는데, 가격이 10유로가 나와서 왜이리 비싼가 했는데, 알고보니 여기는 사설이었고, 시립은 바로 옆에 있었다. 처음에는 똥 밟았다는 마음이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다들 사립을 선호했는지 이 알베르게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침대 4개짜리 방을 혼자 쓸 수 있었다. 일종의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길 건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나오는데 뭔가 느낌이 들어 시립 알베르게 쪽으로 가보니 세상에, 체크인을 하고 있는 햄누나가 보였다. 참 사람의 인연이란 게 신기하다. 햄누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햄누나만큼 반가웠던 건, 그 날 햄누나가 가져온 불닭볶음면이었다.

[글/사진 : 강민재 기자]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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