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중 1944년 첫 남편 이철식 씨를 만나 결혼했지만 얼마 못가 파경을 맞았다. 1951년 여동생 옥희(당시 28세)의 죽음과 첫 결혼 실패는 이후 그녀의 작품세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46년 광주여고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수 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1955년 국전에서 대통령상, 1964년 문예상을 받았다.
천 화백은 6·25 동란 이후 '현대문학' 등 문예지에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다. 첫 수필집 '여인소묘'를 비롯해 '오월초', '설야', '유성이 가는 곳', '언덕 위에 양옥집' 등이 있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
그러다 1991년 미술계 최대 스캔들인 '미인도' 위작 사건이 터지면서 천 화백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당시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위작시비로 천 화백은 심적 충격을 받고 절필을 선언했다. 그는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맏딸이 있는 뉴욕으로 떠났다.
2003년 봄 뇌출혈로 병상에 누웠고 이후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되면서 국내 미술계에서는 10여 년 간 사망설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에게 지급하던 수당 지급을 중단해 다시 한 번 사망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대한민국예술원은 천 화백의 생사여부 확인을 요청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탈퇴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경자 화백의 '화병이 된 마돈나'.<사진출처=서울시립미술관> |
◇여인의 한과 환상을 화려한 원색으로 표현...한때 평가 절하되기도= 천 화백은 1960~1980년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리며 자신 만의 화풍을 개척한 스타 화가였다.
1960년대 그가 채색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 때 왜색풍의 그림을 그린다며 보수적인 국내 화단에서 평가절하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 만의 작가정신으로 험난한 시절을 견뎌내고 마침내 해방 이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 받는다.
천 화백의 그림은 그 자신의 생활감정을 포함해 자연의 아름다움, 생명의 신비, 인간의 내면세계, 문학적인 사유의 세계 등 폭넓은 영역을 포괄한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심적인 이미지로 떠오르는 꽃과 여인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통한다.
꽃과 여인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상징성을 내포한다. 일상적인 생활 감정 뿐만 아니라 속내를 은유적이고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동양화의 조형개념에 충실함으로써 서양화의 추상개념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있는데 그의 그림에서 사실적인 형태만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가 추상적이다.
천경자 화백의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사진출처=서울시립미술관> |
천 화백의 작품은 '자전적이다' 라는 평과 함께 독자적인 화풍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천 화백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자신의 삶과 꿈, 환상, 동경의 세계를 표현했다. 천 화백 자신은 이러한 감성을 한마디로 '한(恨)'이라고 표현했다.
'천경자' 라는 존재를 화단에 강하게 인식시켜준 '생태'를 비롯해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꽃무리 속의 여인' 등 대표작 57점과 드로잉 36점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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