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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② 영화인으로 북적이던 충무로, 그때 그 거리 - 충무로에 밀집된 20여 개 영화사, 근처 다방은 인력 시장 역할까지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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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전성기에 명보극장(상)에는 사람이 몰렸고, 충무로의 길거리(하)에는 맛집과 다방이 즐비했다. <사진제공=신영균문화재단,영화의메카 충무로E북>

'술마시고 담배 피고…' 식당의 풍경이 아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조차 어렵지만 70년대 충무로에 즐비했던 영화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이런 풍경을 낭만으로 미화하기엔 그렇지만 당시 뿌우연 담배연기로 인해 스크린이 흐릿하게 보였다. 또 술을 마신 관객들이 극장안에서 잠이 들면 여기 저기서 코고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런데도 영화 팬들은 그러려니 하고 충무로를 찾았다. 

 

배고프고 특별하게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 영화관은 서민들의 휴식 장소였다. 특히 학생들에게 충무로는 유흥 장소이기도 했다. 청소년들은 극장에 입장하려고 일부러 부모님의 옷을 입고 성숙한 모습으로 극장을 찾았다.

선생님이 미성년자 관람 불가 극장에 입장한 학생의 귀를 잡고 나오는 모습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1974년도 언론은 '미성년 단속이 극장가의 골칫거리로 대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를 보도한 언론은 '방학 때라도 자녀가 외출할 때는 교복을 입힐 것'을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극장에서 사건 사고가 이어졌다. 1963년 '가미가제 특공대'의 개봉일이었다. 대한극장은 정원제를 무시하고 몰려든 관객과 단체 관람 학생을 입장시켜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3층에 있던 학생이 2층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 1960년대 세기극장(서울극장의 개명 전 이름)에 간 한 중학생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 배기관 구멍에서 새어나온 매탄가스에 중독돼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극장의 시설이 낙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영화관을 찾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종로 토박이 고현석 씨(54세·종로구 명륜동)는 “학생 때, 회수권(버스탈 때 차비 대용으로 내는 종이)을 싸게 산 다음에 그걸 제 값에 팔아서 영화관을 갔었고, 또 회수권으로 담배와 술을 산 후 영화를 보았던 간큰 학생들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한 극장에서 한 영화만 상영 

 

요즘에는 한 영화관에서 한 영화만 상영하는 영화관이 없다. 복합 영화 상영관으로 인해 다양한 장르 영화가 상영된다. 그러나 80년대만 해도 한 극장에서 한 영화만 상영되었다. 이러다 보니 입소문을 거친 영화는 긴 줄이 기본이고, 상영기간만 해도 기본이 3개월이고 길게는 7개월(대한극장 벤허)이었다. 

 

1985년 당시 영화 '람보2'를 보기 위해 피카디리 극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첫 회 선착순 관객 100명에게 티셔츠를 나눠주는 이벤트를 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밤을 지새우던 청소년 노숙을 이유로 이를 강압적으로 중지시켰다. 그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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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벤허'(좌), '람보2'(우)등 당시의 인기작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충무로부터 을지로에 이르기까지 긴 줄을 서야했다. <사진제공=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충무로의 영화인들, 낮에는 다방으로 밤에는 여관으로

영화제작사가 밀집된 충무로에는 영화인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낮에는 충무로 다방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밤에는 인근 여관에서 투숙하면서 미래의 영화인을 꿈꿨다. 새벽에 대절버스를 타고 촬영을 떠나는 영화인들을 상대하는 식당들도 많았다. 충무로에 들어서면 골목 가득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대부분은 영화인들이었다. 

 

다방은 영화인들의 안방이었다. 1960년대 충무로 '스타다방'은 조연, 단역, 엑스트라들의 집합소이자 연락사무소였다. 스타다방에 양택조, 남포동 등의 배우들이 몰려있었다. 조감독은 이곳에서 모여 있는 배우들을 지목해 다음 날 촬영에 필요한 배우를 캐스팅했다.

1962년에 문 연 '폭포수다방'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을 연출한 이만희 감독과 그의 사단의 집합소였다. 그런가 하면 '청맥다방'은 시나리오 작가와 조감독이 주로 모였다. 전화기가 없던 시절 다방은 메모를 전해주고, 약속 장소가 되는 등 연락처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동신여관에 투숙하지 않은 사람은 영화인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수많은 작가는 이곳에서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실록 김두한'(1974), '소장수'(1972)등을 연출한 김효천 감독과 윤석주 작가는 3년 동안 동신여관에 전세를 내고 투숙했다. '동백 아가씨'(1964) 등으로 활약한 윤석주 작가는 마지막 작품 '과거를 지닌 여자'와 '오백화'를 남기고 35살의 나이로 동신여관에서 요절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영화 상영정보는 골목길 포스터 

 

영화 상영 정보는 골목길 담벼락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신문 광고, 영화 월간지를 통해 접했다. 영화관 앞에 걸려 있던 직접 그린 대형 간판, 버스 정류장마다 빼곡하게 붙어있던 영화 포스터들. 복도에 앉아서 입석도 있었던 영화관 내부, 본 영화 상영 전에 꼭 봐야만 했던 대한뉴스 등은 이제 광고로 대처 되면서 극장의 주수입원이 되었다. 

 

충무로가 영화산업의 대명사가 되면서 덩달아 충무로 인쇄소 거리. 충무로 사진 현상소, 충무로 카메라 점이 번창했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떠난 충무로에선 더이상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이젠 강남이 충무로를 대체하고 있다. 

 

원로 영화평론가 김두호(69세)씨는 "지금도 영화계에선 ‘충무로가 사랑한’, ‘충무로 대표 배우’ 등의 말이 회자되고 있다"면서 "이는 충무로가 얼마나 ‘한국영화계’를 상징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고 밝혔다. 김 평론가는 "모든 영화인들의 가슴속에는 충무로의 '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충무로의 해가 잠시 질 뿐이지 영원히 지지는 않을 것이다"고 덧붙였다(서울=포커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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